1946년 개업 후 대구 따로국밥의 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대구 따로국밥을 대표하는 곳이다. 1946년 대구 한일극장 옆 공터에서 나무를 팔던 서동술 할아버지를 위해 김 할머니가 시장까지 와서 점심을 해주곤 했다. 정 많은 노부부는 국 냄새를 맡고 모여드는 나무꾼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국을 더 끓여 나눠주기도 하다가 할아버지의 제의로 국밥 장사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의 운송수단인 '구루마'에 국솥을 싣고 시장과 집을 왕래하면서 그 유명한 대구 따로국밥의 역사가 탄생하게 된다.
간판도 없이 시작해 성당동 할매집, 서씨 할배집으로 불리다가, 6.25 사변이 터지면서 전쟁 통에 한일극장에 유랑극단의 배우들과 타지의 피난민들이 이 국밥집을 자주 찾았는데 까다로운 여배우들이 국과 밥을 따로 요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갓 쓴 지체 높은 양반들이 "이게 상놈이나 먹는 국이지" 하면서 국 따로 밥 따로를 요구하면서 '따로국밥'이라는 말이 처음 생겼다고 한다.
국일이라는 간판은 1965년 영남지역의 소주 '금복주'가 흥보 차원에서 처음 간판을 달아주게 된다. 서씨 할아버지가 '나라에서 제일 맛 좋은 국밥집' 이란 뜻으로 '국일'을 상호로 정하고 금복주의 요청으로 왼편에는 붉은 페인트로 금복주를 오른 편에는 금복주의 복 영감 마크를 넣은 함석 간판을 달고 처음으로 국일이라는 상표를 사용하게 된다. 국일과 관련한 웃지 못할 일화도 많은데, 국일은 훗날 주먹왕 김두한의 측근으로 활동한 국일 나이트클럽과의 상표 분쟁에 승소하여 로열티를 받기도 했다. 통금이 있던 시절엔 중부경찰서 야통 단속 경찰들이 첫 국을 맛보기 위해 통행금지 해제 30분 전에 이 집을 이용하는 특권 아닌 특권으로 인해 30분 먼저 통금이 해제되는 집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