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기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승려 지공(指空)이 1328년(충숙왕 15)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 중창한 266칸의 회암사 절터로, 창건 시기는 1174년(명종 4) 이전으로 추정된다. 당시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회암사의 승려 수는 무려 3천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절로 알려져 있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찾은 곳이 회암사일 만큼 조선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중종 비 문정왕후가 불교 재흥정책을 펼 때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왕후가 죽고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1565년(명종 20) 사월 초파일에 주지가 잡혀가고 절이 불태워지면서 폐허화되었다.고려 말 학자인 목은 이색은 회암사를 보고 '아름답고 장엄하기가 동방에서 최고'라는 찬사를 보냈을 정도로 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했던 회암사는 폐사의 길로 들어서 현재는 빈터에 석축만 남아 있다. 옛 절터는 196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1998년부터 2012년까지 대규모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500m쯤 올라가서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 현재의 회암사가 있다.
[ 세종포천고속도로 옥정 IC 바로 앞, 양주시립 회암사지박물관을 지나면 위치 ] 회암사지 : 경기 양주시 회암동 18박물관 : 경기 양주시 회암사길 11 (율정동 299-1)